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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공부 16탄 백제의 멸망과 의자왕 이야기

by 솔찬기자 2025. 9. 6.

백제의 멸망과 의자왕 이야기 (서울송파 석촌동 백제 초기 적석총 제1호분,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의자왕 즉위 배경과 백제 말기 권력 구조

의자왕, 즉위, 권력, 말기라는 네 가지 말로 시작해 본다. 한 나라가 기울 때는 왕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랜 전쟁, 땅의 줄어듦, 사람 마음의 흩어짐이 함께 움직인다. 백제 말기의 흐름도 그 안에서 본다.
의자왕은 무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왕위에 오른 뒤 먼저 질서를 세우려 했다. 궁궐과 관청의 기강을 다잡고 지방의 힘센 집단을 누그러뜨리는 데 힘을 썼다. 왕이 바뀌면 새 질서에 반발이 생기기 마련이라, 왕권을 단단히 하려는 조치가 앞섰다. 기록에는 왕이 처음엔 검약했고 억울한 죄가 생기지 않게 살폈다는 말도 남아 있다. 하지만 나라 바깥의 압박이 거셌고, 오래된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 무렵 신라는 영토를 북쪽과 동쪽으로 넓히며 기세가 올랐다. 고구려는 여전히 산과 요새를 바탕으로 버티는 힘이 강했다. 백제는 한강을 잃은 뒤 해상 교통을 의지하며 남서부에서 살아남는 길을 찾았다. 바닷길은 무역과 외교에 도움이 됐지만, 육지 전선은 길고 넓었다. 전쟁이 잦아지면 곡식과 사람의 여유가 먼저 줄어든다. 창고가 비면 다시 채우려면 여러 해가 필요하다.
백제 안에서도 권력의 중심이 웅진과 사비를 오가며 바뀌었다. 지방의 유력한 집단은 군사와 곡식을 손에 쥐고 있었고, 왕은 그 힘을 빌리면서도 견제해야 했다. 힘의 균형이 흐트러지면 한쪽이 지나치게 커지고, 다른 쪽은 불만을 품는다. 백제가 말기로 접어들수록 중앙의 손길이 지방 구석구석까지 미치기 어려워졌다. 바닷길은 빠르지만, 내륙의 길은 느리고 험했다.
왕권 강화에는 상과 벌이 함께 쓰였다. 충성한 이에게는 벼슬과 토지를 주고, 어긴 이에게는 벌을 주는 방식이다. 그런데 상벌은 형식보다 공정함이 중요하다. 전쟁이 늘고 국고가 비면 상을 줄 여지가 줄고, 벌은 더 거칠어지기 쉽다. 이런 흐름은 사람 마음을 멀어지게 만든다. 사람 마음이 흩어지면 병사 수는 같아도 싸움의 기세가 약해진다.
642년에 백제는 신라 서쪽의 큰 성을 무너뜨렸다. 대야성 함락은 신라의 숨통을 조였다. 이 일로 신라의 큰 인물이 당나라와 손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작은 승리 하나가 큰 연합을 불러오는 경우다. 곧이어 신라와 당의 만남은 점점 굳어지고,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기대며 맞서는 모양이 되었다. 이때부터 백제 왕실은 대외 전선을 두 갈래로 감당해야 했다. 남쪽 바다와 서쪽 평야를 지키면서, 북쪽 고구려와도 발을 맞추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의자왕의 이름을 두고 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사치와 향락으로 나라가 약해졌다는 말도 있고, 초기 개혁과 통제를 고려하면 과한 비난이라는 말도 있다. 진실은 한쪽만이 아니다. 나라의 기운이 이미 기울고, 바깥의 적이 강해졌으며, 안에서는 사람과 곡식의 여유가 줄어든 때였다. 왕의 선택마다 최선이었는지를 묻기 전에, 선택할 수 있는 길 자체가 얼마나 좁았는지를 먼저 살피는 게 맞다.

 

 

황산벌 전투와 사비 함락, 멸망의 진행

황산벌, 계백, 사비, 함락이라는 네 낱말로 줄기를 잡는다. 큰 전환점은 전투에서 드러나고, 마지막 장면은 수도의 문이 열릴 때 완성된다. 백제 멸망은 한두 날의 일이 아니었고, 여러 갈래의 사건이 이어져 만든 결과였다.
660년 여름, 신라와 당이 함께 움직였다. 당의 수군은 서해를 거슬러 오르고, 신라의 군대는 남쪽 들판을 넘어 올라왔다. 바닷길과 육지길을 동시에 쓰는 방식은 백제의 대응을 갈라지게 만들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적을 막으려면 강과 포구를 지켜야 하고, 육지에서 오는 적을 막으려면 요충지의 재빨른 지원이 필요하다. 한 나라가 두 방향을 동시에 막으려면 병력과 곡식이 넉넉해야 하는데, 말기의 백제는 그 힘이 줄어 있었다.
황산벌에서 백제의 장수 계백이 마지막 의지를 모았다. 병력은 많지 않았지만, 지형을 의지해 버티는 전투를 선택했다. 지형을 잘 쓰면 적은 병력으로도 시간을 벌 수 있다. 시간이 벌리면 수도 방어를 정비할 수 있고, 다른 지역의 군대가 모일 틈이 생긴다. 그러나 신라의 대군은 물러서지 않았고, 전투는 오래 끌며 백제의 힘을 닳게 했다. 전장에서 목숨을 건 충성은 빛났지만, 숫자와 보급의 차이는 끝내 뒤집히지 않았다.
한편 서해로 들어온 당의 수군은 강과 포구를 차례로 넘어왔다. 바닷길은 한 번 열리면 빠르게 깊숙이 들어올 수 있다. 배로 움직이면 보급이 수월하고, 강을 따라 성을 거슬러 오르기도 좋다. 백제가 자랑하던 해상력도 이때는 힘을 쓰기 어려웠다. 강 하구와 포구가 차례로 끊기면, 지방에서 수도로 올라오는 길도 막힌다. 수도 사비는 성벽과 강을 믿었지만, 두 방향의 압박 앞에서 점점 고립됐다.
사비가 함락되는 과정에서는 내부의 동요도 있었다. 오래 버티는 성은 식량이 있어야 하고, 성 안의 사람들이 마음을 합쳐야 한다. 오래된 전쟁은 창고를 비우고, 사람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도 사람이다. 가족이 굶고 고향이 불타면, 창끝을 잡는 손이 떨린다. 나라의 마지막 순간에는 투항과 항복, 끝까지 맞서는 선택이 뒤섞인다. 기록에는 왕이 항복하고, 왕족과 대신들이 끌려가고, 많은 백성이 포로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승리한 쪽은 포로를 정리하고 땅을 나누며 새 질서를 세운다. 패한 쪽은 해가 바뀌어도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이 전쟁에서 눈에 띄는 점은 연합의 힘이다. 신라의 땅군과 당의 수군이 맡은 자리와 길이 달랐고, 서로의 약점을 메웠다. 하나의 길만 막을 수 있었던 백제는 둘의 힘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연합군은 서로 다른 언어와 규범을 조율해야 했지만, 큰 목표가 같을 때는 빠르게 앞을 향한다. 이 흐름은 곧 사비의 문이 열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멸망의 장면은 갑작스럽게 보이지만, 그 뒤에는 수년 동안 이어진 균열과 고단함이 포개져 있다.

 

 

백제 부흥 운동의 전개와 동아시아 정세, 그리고 평가

부흥 운동, 흑치상지, 왜국, 평가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마지막 갈래를 정리한다. 나라는 쓰러졌지만 사람은 남아 있었다. 남은 사람들이 모여 깃발을 세우면 다시 나라의 이름을 부른다. 그게 부흥 운동이다.
사비가 함락된 뒤에도 백제의 깃발은 곳곳에서 올랐다. 왕족과 대신, 지방의 힘있는 이들이 흩어진 병사와 백성을 모았다. 바닷가와 산골짜기, 큰 강의 굽이마다 성이 있었다. 성은 작은 나라와 같아서 굳게 닫으면 며칠, 길게는 몇 달도 버틴다. 그 사이에 인근의 성이 서로 연락해 힘을 합치면 다시 큰 물줄기가 된다. 흑치상지처럼 이름이 전해진 인물들도 있고, 이름 없이 싸운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신라와 당이 나눈 새 질서에 맞섰다.
왜국과의 연결도 주목할 지점이다. 백제는 오랫동안 바닷길로 왜와 오갔다. 학문과 기술, 장인과 음악이 바다를 건너 서로에게 전해졌다. 나라는 쓰러졌지만, 바닷길의 인연은 남아 있었다. 부흥을 꿈꾸는 이들은 왜의 도움을 바라보았고, 실제로 배가 오가며 사람과 물자가 움직였다. 그러나 바다는 넓고, 바람은 늘 같은 편이 아니다. 지원이 있어도 전쟁은 육지에서 벌어진다. 육지의 성을 지키고 길을 잇는 일은 여전히 백제 땅에서 해내야 했다.
당은 전쟁 뒤 질서를 정리하는 데 익숙했다. 승리한 뒤에는 지휘관을 보내고, 땅을 나누고, 문서를 만들어 새 질서를 굳혔다. 신라는 자신의 땅을 넓히고, 남은 저항을 하나씩 돌려세웠다. 연합군이었지만, 전후 처리에서는 이익이 엇갈렸다. 당은 바다 건너에서 영향력을 넓히려 했고, 신라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지키려 했다. 부흥군은 이 틈을 노려 싸웠지만, 큰 흐름을 거꾸로 돌리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결국 부흥 운동은 점차 꺼졌고, 백제의 이름은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평가의 문제로 돌아오면, 의자왕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시선은 이제 힘을 잃고 있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사회, 한강을 잃고 좁아진 땅, 연합군이 만든 두 방향 압박, 내부의 보급난과 인심의 피로가 겹쳤다. 의자왕의 선택 중에는 분명 아쉬운 것도 있었다. 그러나 한 왕의 잘못만으로 나라가 쓰러졌다고 말하면, 백성의 고단함과 구조의 문제를 보지 못한다. 역사는 한 사람의 성품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삶과 땅의 조건, 이웃 나라의 움직임이 함께 만든다.
이렇게 정리하면 배울 점이 선다. 첫째, 작은 승리 뒤의 큰 파장이다. 대야성 함락은 당과 신라의 굳은 손을 불렀다. 둘째, 두 갈래 전선의 부담이다. 바다와 육지를 동시에 막을 힘이 없으면, 어느 한쪽이 무너지며 전체가 흔들린다. 셋째, 마음과 보급의 관계다. 창고가 비면 마음이 약해진다. 마지막으로, 패망 뒤에도 삶은 이어진다. 부흥 운동은 실패했지만, 그 끈기는 다음 시대의 기억이 된다. 역사 공부의 목적은 승자와 패자 이름을 외우는 데 있지 않다. 비슷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생각하는 데 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부식, 삼국사기.
일연, 삼국유사.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교육과정 기준서, 통합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