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벌 귀족과 무신의 갈등 배경
문벌, 차별, 군인, 불만이라는 네 낱말로 시작해 본다. 고려 중기는 집안으로 이어지는 세력, 곧 문벌 귀족이 권력을 나눠 가지며 나라를 이끌었다. 글과 예를 앞세운 관료 체계가 굳어지자 전쟁과 치안을 맡은 무신은 같은 벼슬을 달고도 자리와 대우에서 한 걸음 뒤로 밀렸다. 궁궐 의식과 연회, 인사와 상벌에서 작은 차별이 쌓이면 마음의 상처가 된다. 전쟁과 사냥, 호위와 경계 같은 힘든 일을 도맡던 무신들은 “일은 우리가 하는데 공은 남이 가져간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나라 살림도 편치 않았다. 지방에서는 토지가 점점 몇몇 손에 모였고, 백성은 세금과 부역에 눌렸다. 전쟁과 가뭄이 겹치면 곡식은 모자라고, 관청의 방비도 느슨해진다. 이런 때에는 군인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지만, 상벌이 어긋나면 오히려 불만이 커진다. 결국 군영 안의 이야기와 지방 관리의 하소연이 서로 얽히며 “이대로는 어렵다”는 말이 퍼졌다.
불만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는 듯 보이지만, 그 앞에는 오랜 쌓임이 있다. 문벌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문신 우대와 무신 천대, 흔들리는 지방 통치와 재정, 그리고 잦은 의식과 연회에서 드러난 모욕이 그 쌓임을 만들었다. 의종 때 연회 자리에서 무신들이 모욕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았는데, 이런 사건은 불만의 불씨에 불바람을 붙이는 구실을 했다. “힘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이 군영 안에서 나왔고, 마침내 칼끝이 궁궐을 향했다.
1170년 정변의 전개와 권력 교체
정변, 의종, 명종, 정중부라는 네 낱말로 줄기를 잡는다. 1170년, 무신 세력이 군대를 움직여 궁궐을 장악했다. 왕 의종은 물러나게 되었고, 새 왕으로 명종이 올랐다. 왕실의 이름은 이어졌지만, 권력의 손잡이는 무신이 쥐게 되었다. 정변의 첫 물결은 이의방과 정중부 같은 장수가 이끌었고, 그 뒤로는 권력의 얼굴이 몇 차례 바뀌었다.
정중부가 앞장선 무신 정권은 반대 세력을 눌러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칼로 세운 권력은 칼을 경계해야 한다. 군영의 신망을 누가 더 얻었는지, 어느 장수가 어느 군대와 더 가깝고, 어떤 집안이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가 곧 정치가 되었다. 정중부 다음에는 경대승이 떠올랐고, 다시 이의민이 자리 잡았다가, 마침내 최충헌이 큰 물길을 틀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피가 흘렀고, 궁궐의 인사와 직책은 잦은 바람을 탔다.
최충헌이 일으킨 변곡은 크다. 그는 왕을 바꾸는 일까지 주도하며 국정의 큰줄을 손에 넣었다. 교정도감 같은 기구를 두어 나라 일을 총괄했고, 인사권을 쥐는 정방을 통해 벼슬길을 관리했다. 뒤를 이은 최우는 서방을 두어 문사들을 거느리며 정권의 머리와 팔을 더 탄탄히 했다. 이렇게 하여 무신정권은 한 사람의 기세가 아니라, 집안과 기구로 이어지는 체계를 갖추었다. 겉으로 왕은 왕이었으나, 실무의 문은 무신정권이 쥐고 열었다 닫았다.
무신정권의 통치 방식과 민란, 그리고 평가
도방, 민란, 최씨정권, 평가라는 네 가지 낱말로 갈래를 맺는다. 무신정권은 먼저 몸을 지키는 조직부터 다졌다. 경대승이 시작한 도방 같은 사병 조직은 권력의 방패였다. 방패가 두꺼워지면 누구도 쉽게 덤비지 못한다. 그러나 방패만 두꺼우면 백성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곳곳에서 세금과 부역의 무게가 도를 넘자, 누적된 불만이 바다의 파도처럼 겹쳐 왔다.
1176년 공주 근처의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봉기했다. 억눌린 고을 사람들은 소금 같은 필수 물자의 부담과 잡다한 잡역에 지쳐 있었다. 산과 들로 모여든 이들은 관청에 맞섰으나 곧 진압되었다. 1193년에는 김사미와 효심이 경상도 일대에서 들고일어났다. 길을 막고 성을 치며 자신들의 고을을 지키려 했지만, 역시 관군의 손에 꺾였다. 1198년에는 개경에서 만적이 거사하려 했다. 그는 노비였으나 “사람은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남기며 주인을 베어 새 질서를 만들려 했다. 거사는 발각되어 실패했지만, 그 말은 당시 사회의 뒤틀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씨 정권은 이런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군사와 재정을 더더욱 손에 쥐었다. 교정도감에서 큰일을 조정하고, 정방으로 인사를 관리했다. 지방에는 토지와 창고를 다시 세는 조사를 벌였고, 때로는 사원과 호족의 힘을 빼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뿌리가 칼과 사병에 놓여 있었기에, 근본을 고치는 일은 더디었다. 왕권은 껍데기만 남았고, 조정의 사람들은 최씨 정권의 눈치를 보았다. 나라의 바깥 사정도 변했다. 바다 건너 큰 나라의 움직임이 점점 가까워지며, 앞으로 닥칠 더 큰 바람을 예고했다.
평가의 자리에서는 몇 가지를 배운다. 첫째, 차별은 작은 듯 보이지만 오래 쌓이면 폭발한다. 문신과 무신의 차별이 그랬다. 둘째, 칼로 얻은 권력은 칼을 필요로 한다. 도방과 사병이 권력을 지키는 동안 민생은 늦게 나아졌다. 셋째, 백성의 삶을 가볍게 하지 않으면 민란은 사라지지 않는다. 망이·망소이, 김사미·효심, 만적의 움직임은 권력의 바깥에서 삶을 바꾸려는 몸부림이었다. 마지막으로, 제도는 사람을 넘어야 한다. 교정도감과 정방 같은 기구는 권력을 단단히 했지만, 공정과 신뢰라는 속을 채우지 못하면 흙담처럼 비에 무너진다. 무신정변은 왕을 바꾼 사건이 아니라, 나라의 힘이 어디에 놓였는지를 바꾼 사건이었다. 그 영향은 뒤 시대까지 그림자처럼 길게 이어졌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사》, 《고려사절요》.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교육과정 기준서, 통합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