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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공부 18탄 대한제국 선포와 고종의 커피 사랑

by 솔찬기자 2025. 9. 6.

대한제국 선포의 배경과 환구단 즉위, 경운궁의 변화

대한제국, 선포, 환구단, 광무라는 네 낱말을 붙잡고 시작한다. 조선 말기는 안팎으로 흔들렸다. 바깥에서는 강한 나라들이 군함과 자본을 앞세워 문을 두드렸고, 안에서는 제도와 재정이 오래된 틀에 갇혀 있었다. 왕실의 큰 슬픔과 혼란이 이어진 뒤, 왕은 한때 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뒤엔 예전과 다른 신호가 필요했다. “스스로 선다”는 뜻을 알리는 신호 말이다.
그 신호가 바로 대한제국 선포였다. 조선이라는 이름을 넘어,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로 격을 올린 것이다. 이는 단지 이름을 바꾼 일이 아니라, 새 시대의 주도권을 스스로 쥐겠다는 선언이었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치른 곳이 환구단이다. 둥근 제단에서 하늘에 예를 올리고, 황제 즉위를 알렸다. 이때부터 연호도 바꾸어 광무라는 이름을 썼다. 연호는 나라의 시간을 새로 세는 표시다.
궁궐의 중심도 달라졌다. 왕이 머물던 궁이 넓혀지고 고쳤으며, 돌 건물과 유리창 같은 새양식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이곳을 경운궁이라 불렀고, 시간이 지나 덕수궁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퍼졌다. 도성의 풍경도 바뀌었다. 전신선이 늘고, 도로가 정비되고, 전차와 가로등 같은 시설이 도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과 의식, 공간이 함께 바뀌며, “근대”라는 낯선 기운이 눈앞의 풍경이 되었다.

 

 

광무개혁의 내용과 한계: 땅, 군사, 길, 학교

개혁, 토지, 군대, 통신이라는 네 낱말로 줄기를 잡는다. 새 이름을 세웠다면 속을 채워야 한다. 광무개혁은 나라의 몸을 다시 짜려는 시도였다. 먼저 토지를 제대로 조사해 세금의 기준을 바로잡으려 했다. 오래된 장부만 믿지 않고, 실제 경작과 소유 관계를 확인해 국가의 수입을 고르게 하려는 뜻이었다. 토지가 깨끗이 정리되면 백성은 기준을 알 수 있고, 국가는 필요한 곳에 돈을 쓸 수 있다. 하지만 현장의 이해관계가 복잡해 일이 더뎠고, 전부를 끝내지는 못했다.
군사도 손봤다. 복장과 훈련, 지휘 체계를 고치고, 새 무기를 들이려 했다. ‘황제의 군대’라는 이름값을 하려면 장비와 규율이 갖추어져야 했다. 그러나 장비를 들이려면 돈이 들고, 훈련을 바꾸려면 시간이 든다. 바깥의 큰 나라들이 저마다 영향력을 넓히려는 와중에 이 개혁은 자주 휘청거렸다.
길과 통신은 변화가 더 눈에 보였다. 서울에 전차가 달리고, 전신·전화가 관청과 항구, 철길을 잇기 시작했다. 바다는 등대로 밤길을 밝혔고, 항만 시설도 차츰 정비되었다. 철길이 놓이면서 물자와 사람이 이전보다 빠르게 이동했고, 도성 안엔 가로등이 켜져 밤 풍경이 달라졌다. 화폐와 은행 제도도 차츰 정비해 거래를 쉽게 하려 했다.
학교도 세워 인재를 기르려 했다. 서양식 과목과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이 늘었고, 관청에는 통역과 기술자를 키우는 자리도 생겼다. 새 제복과 새 기계, 새 교과서가 들어오며 업무 방식이 바뀌었다. 그러나 개혁의 속도와 범위는 고르지 못했다. 재정의 밑천이 얇았고, 국제 정세의 바람이 거세었다. 좋은 제도를 세워도, 바깥의 압력이 커지면 그 제도는 흔들렸다. 광무개혁은 “바르게 세우려는 뜻은 컸으나, 시간이 부족했고 바람이 컸다”는 평가를 함께 남겼다.

 

 

고종의 커피 사랑과 정관헌, 손탁의 이야기

커피, 정관헌, 손탁, 근대문화라는 네 낱말로 갈래를 맺는다. 새 시대의 도성에는 낯선 향이 떠돌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배라 부르기도 하고, 양탕국이라 부르기도 했다. 바로 커피다. 커피는 외국 공사관과 선교사, 상인들을 따라 들어왔고, 궁궐에도 자리 잡았다.
덕수궁 안에는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누각이 세워졌다. 기둥과 베란다가 어우러진 이곳에서 황제는 바깥 공기를 쐬고 외국 손님을 만나기도 했다. 기록과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이곳에서 황제가 커피를 즐겼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향이 진하고 맛이 쌉쌀한 이 음료는, 바쁜 정무 사이 머리를 맑히는 한 잔이 되었고, 손님을 맞는 자리의 예가 되기도 했다. 커피잔과 받침, 설탕과 우유 같은 새로운 식기와 식습관도 함께 들어왔다.
도성 바깥에서도 커피는 서서히 퍼졌다. 궁궐 가까이에 서양식 영빈관과 다과 공간이 생겨 외국인과 조선인이 함께 차와 빵, 커피를 즐겼다. 이곳을 이끈 이로 손탁이라는 여인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궁과 가까운 자리에서 외교 손님을 맞으며 새로운 문화의 통로 역할을 했다. 그 주변에는 문인과 관리, 상인들이 모여들어 근대의 소문을 나누었다. 커피 한 잔은 그 자체로 맛이었지만, 동시에 만남과 정보, 외교와 문화가 섞이는 자리였다.
커피에는 또 다른 이야기도 딸려 있다. 낯선 맛과 향은 때로 의심을 불러, ‘독 커피’ 같은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새것은 설렘과 두려움을 함께 데려온다. 그러나 궁과 도성은 결국 커피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양념과 빵, 테이블과 의자, 유리창과 전등이 그러했듯, 커피도 근대의 풍경 속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덕수궁을 거닐다 보면, 정관헌의 베란다와 돌기둥이 그 시절의 바람을 아직도 전한다.
정리하면, 대한제국 선포는 이름을 바꾸는 의식이 아니라 주권을 스스로 밝히는 선언이었고, 광무개혁은 그 선언을 삶으로 옮기려는 제도와 시설의 손질이었다. 커피는 그 변화의 한복판, 궁궐과 거리의 생활 문화를 잇는 상징이 되었다. 이름, 제도, 생활—이 세 갈래가 함께 움직이며 조선 말과 대한제국 초의 풍경을 바꾸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발췌.
문화재청 덕수궁·정관헌 안내 자료.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교육과정 기준서, 통합본).